[기계신문] 손쉽고 값싸게 만들며 유연한 ‘유기 반도체’는 실리콘 반도체를 대체할 전자소재로 인식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유기 반도체의 전하 이동도가 낮아 상용화가 더뎠는데, 최근 새로운 공정으로 전하 이동도를 대폭 높인 연구가 발표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올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양창덕 교수 연구팀은 이병훈 이화여대 교수, 이정훈 동서대 교수와 공동으로, 유기 반도체의 구조를 불규칙하게 배열해 전하 이동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기존에는 고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의 위치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야 전하 이동도가 높다고 알려졌는데, 이를 뒤집은 것이다.

▲ 유기 반도체 특성을 높인 UNIST 연구진_왼쪽부타 이상면, 강소희, 조용준 연구원

유기 반도체로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FETs) 등의 전자소자를 만들려면, 전하 수송 능력이 확보되어야 한다. 반도체가 전하를 잘 전달해야 많은 신호를 보내고 정보처리도 빠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유기 반도체의 전하 수송 능력을 높이기 위한 기초 연구를 진행해왔다.

연구팀은 전하 수송 능력을 높이는 전략 중 ‘위치규칙성(regioregularity)’에 주목했다. 위치규칙성은 고분자를 이루는 반복 단위가 일정한 규칙을 띠며 배치되는 걸 뜻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고분자의 위치규칙성이 높을수록 전하 이동도가 높다고 알려졌다.

연구팀은 고분자로 합성할 때 위치규칙성을 띠게 되는 분자들을 이용해 새로운 ‘위치규칙성 고분자(RR)’를 합성했다. 똑같은 분자들을 재료로 써서 위치불규칙성(regiorandom)을 띠는 고분자(RA)도 만들었다.

▲ 위치불규칙성 고분자가 병에 담겨 있다

강소희 UNIST 에너지공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연구원은 “고분자를 이루는 분자들이 규칙성을 가지고 배열되도록 합성하면 전하 이동도가 높아진다는 점을 고려해 고분자 합성을 설계했다”며 “위치불규칙성 고분자는 위치규칙성 고분자와 대부분의 특성이 유사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새로 합성한 두 고분자의 전하 이동도를 확인하기 위해, 두 물질을 이용한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를 제작했다. 이때 나노 크기의 홈이 파인 기판에 고분자를 넣고 주물(鑄物)을 하듯 필름 형태로 가공했다.

▲ 위치불규칭성 고분자를 이용해 만든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의 모습

이렇게 제작한 트랜지스터에서 위치규칙성 고분자의 전하 이동도는 9.09 ㎠V⁻¹s⁻, 위치불규칙성 고분자의 전하 이동도는 17.82 ㎠V⁻¹s⁻로 나타났다. 이는 1볼트/센티미터(V/㎝)의 전기장을 걸어줬을 때 1초 동안 전하 하나가 9.09 ㎝, 17.82 ㎝ 이동하는 수준이다.

기존 유기 반도체의 전하 이동도가 대부분 최대 한 자릿수에 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뛰어난 수준이다. 특히 위치불규칙성 고분자의 전하 이동도가 더 뛰어난 결과는 기존 통념을 뒤집는 결과다.

▲ 위치규칙성에 따른 고분자 핵자기공명(Nuclear Magnetic Resonance, NMR) 구조분석(위)과 원자력현미경(Atomic Force Microscopy, AFM)을 이용한 일반적인 드롭-캐스트(drop-cast) 공정에 따른 박막과 샌드위치 형식의 주물 기술로 형성된 박막의 특성 비교(아래)

양창덕 교수는 “이번에 합성한 위치불규칙성 고분자의 전하 이동도는 현재까지 보고된 최고 수준의 수치”라며 “구조적인 위치화학을 이용해 고성능 고분자를 개발할 수 있는 새로운 시야를 제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위치불규칙성 고분자의 전하 이동도를 잘 이해하기 위한 체계적인 연구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며 “이런 결과들이 모여 유기 반도체의 상용화를 앞당기고 활용 분야를 넓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연구 성과는 독일에서 발행되는 응용 화학 분야 국제학술지 ‘앙게반테 케미(Angewante Chemie)’ 최근호에 게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