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여명 아동 분석… “눈 맞춤보다 맥락별 시선 분석 중요”


[기계신문] 우리가 흔히 ‘자폐’라고 부르는 신경발달 장애의 정식 명칭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 ASD, 이하 자폐)다. 이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반복적이고 제한적 행동과 비전형적 감각 등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자폐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자폐가 태아기부터 신경학적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데에 많은 학자가 동의한다.

그러나 기존 ‘자폐 진단 도구’는 특성상 4세 이후에 자폐 진단을 받는 아동이 대부분이며, 이후 치료적 개입도 그만큼 늦어진다. 따라서 뇌 발달이나 언어 및 사회성 발달 등에 중요한 초기 0~3세 사이에 적절하게 조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학계에서는 기존의 검사 도구 대신 영유아의 눈 움직임을 추적해 자폐 영유아의 특징을 찾는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타인과 눈 맞춤 결여와 비전형적인 시각적 주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대표적 증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영유아의 눈 움직임 추적’이 자폐 선별에 사용될 유력한 후보로 여러 연구에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자폐 영유아 대상 연구의 상당수가 15명 미만의 적은 수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이뤄졌으며, 연구의 결론도 상이한 경우가 많다. 또 자폐는 그 공식 명칭마저 연속성을 뜻하는 ‘스펙트럼’이라는 단어를 넣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변경될 만큼, 개인별 증상이나 증상의 심각성 정도가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자폐 영유아 고유의 특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개인차를 반영할 수 있을 정도의 대규모 데이터가 필요하다. 또 자폐 외에도 일반 영유아와 다른 눈 응시를 보일 가능성이 있는 여러 비교집단과 추가 비교가 필요하고, 특정 문맥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맥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반복되는지 검증해야 한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기초과정부 권미경 교수는 미국 UC샌디에이고의 캐런 피어스 박사와 함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보이는 영유아의 특징을 분석했다. 1~4세 사이의 영유아 616명을 대상으로 눈 운동을 관찰해 자폐를 보이는 영유아의 특징을 정리한 것이다.

권미경 교수는 “기존 연구들은 주로 15명 내외의 자폐 영유아를 대상으로 연구해 신뢰도 확보가 어려웠다”며 “이번 연구에서는 자폐 영유아를 포함한 616명을 분석하고, 집단별로 비교도 진행해 신뢰도 높은 결과를 얻었다”고 이번 연구를 소개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만 1세에서 4세 미만 영유아 616명의 눈 운동을 관찰했다. 실험에서는 참가자에게 ‘까꿍’, ‘안녕’ 등과 같은 간단한 대화와 몸짓이 포함된 1분 미만의 짧은 동영상을 보여주고, 이들이 어느 부분을 얼마나 오래 보는지 컴퓨터 프로그램과 연결된 눈 운동 추적기로 분석했다.

▲ 연구에 사용된 동영상의 예시(그림 상단)와 아동이 동영상 속 배우의 눈을 응시한 시간 비율(그림 하단 그래프)

자폐 영유아 고유의 특징을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집단을 실험대상에 포함했다. 자폐 진단을 받은 영유아뿐만 아니라 자폐 및 다른 발달지연 문제나 가족력이 없는 아동, 언어를 비롯해 전반적 발달지연을 보이는 아동, 자폐의 몇 가지 증상을 보이나 진단을 내릴 만큼 정도가 심하지 않은 아동의 눈 움직임도 함께 비교한 것이다.

또 종단적으로 차이가 나타나는지 추가 검증도 진행했다. 실험대상 중 90여 명의 아동에게 약 반년 후 다시 동일 영상을 시청하였고 컴퓨터와 연결된 눈 운동 추적기가 아동의 눈 움직임을 기록했다.

그 결과 자폐 영유아들이 동영상 속 인물의 눈을 응시한 총 시간은 다른 아동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똑같은 동영상에 자폐 아동들이 좋아한다고 알려진 기하학적 무늬를 추가하거나, 인물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정지된 모습을 보여줘도 자폐 아동들이 동영상 속 인물의 눈을 응시한 총 시간은 여전히 다른 집단과 유사했다.

자폐 집단 내 개개인의 눈 응시 자료를 비교해 본 결과,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눈을 응시하지 않은 자폐 아동도 있었지만 다른 아동들처럼 오랫동안 눈을 응시하는 자폐 아동도 있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차이는 다른 집단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됐으며, 그 정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나이가 들수록 자폐 영유아가 일반 영유아보다 타인의 눈을 응시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최근 학설과 달리 자폐 영유아의 눈 응시 시간은 다른 영유아와 차이가 없었으며, 개인차 정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편 자폐 영유아는 다른 영유아보다 동영상 속 인물의 얼굴을 덜 보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기하학적 무늬 등 다른 물체들이 함께 제시될 때 얼굴 대신 다른 물체를 보는 경향이 더 강했다. 이런 결과는 자폐 영유아가 사회성이 떨어지는 이유가 눈 자체에 대한 흥미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문맥에 맞게 중요한 정보로 주의 집중하는 능력이 일반인과 다르기 때문일 가능성을 지지한다.

▲ 흰색에 가까울수록 자폐 아동과 다른 집단이 차이가 크지 않음을 의미하며 보통 효과 크기지수 0-0.2 사이는 효과가 거의 없거나 작다고 해석된다. 짙은 발강에 가까울수록 자폐 아동이 다른 아동보다 더 오랫동안 특정 부위를 응시하는 것을 의미하며, 짙은 파랑에 가까울수록 자폐 아동이 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권미경 교수는 “타인의 감정을 볼 때 눈을 보고, 말하기를 배울 때는 입을 보며, 사람이 말할 때 옆에 다른 물체가 있어도 얼굴을 보는 게 일반적”이라며 “자폐 영유아의 경우에는 이처럼 상황이나 맥락에 맞게 무언가에 집중하는 게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이번 연구에서 분석된 자폐 영유아의 시선 처리를 활용하면 자폐를 진단하는 소아과 의사나 의료진, 이들을 치료하는 발달/임상 전문가 등에게 유용한 진단 도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자폐는 조기 발견할수록 치료 효과가 커지는 만큼 이번 연구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특히 이번 연구는 15~30명을 대상으로 했던 기존 연구와 달리 600여 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실시돼, 놓치기 쉬웠던 개인 차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는 자폐 조기 발견과 진단, 치료에 큰 장벽으로 알려진 개인차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예를 들어, ‘타인의 눈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잘 알려진 단일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자칫 자폐 신호를 놓칠 우려가 있다. 이에 따라 전문가뿐만 아니라 아동과 직접 대면하는 부모와 교사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다양한 증상을 함께 고려해 자폐 초기의 신호를 파악해야 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조기 발견은 조기 치료로 이어질 수 있다. 아동의 뇌와 언어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 0세부터 3세 사이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자폐 아동은 다른 자폐 아동보다 사회성과 의사소통, 적응 능력 등이 더 크게 향상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연구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조기에 발견해 적절하게 손 쓰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이번 연구는 미국 소아청소년정신의학저널(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Child and Adolescent Psychiatry) 3월 6일일자 온라인판에 공개됐으며, 출판을 앞두고 있다. 연구지원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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