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질소로 냉각 가능한 영하 170도에서 수소 동위원소 분리

[기계신문] 중수소는 ‘인공태양’이라 불리는 핵융합에 필요한 핵심 에너지원으로 여러 산업과 연구 분야에 필요한 미래자원이다. 하지만 중수소를 얻는 일은 쉽지 않다.

중수소가 수소 동위원소 혼합물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낮고, 수소와 중수소의 크기나 모양 물리‧화학적 성질이 매우 비슷해 분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소 혼합물에서 중수소를 효율적으로 분리하는 일이 현대 분리기술 중 중요한 도전과제로 꼽히기도 한다.

이때 동위원소란 원자번호는 같지만 중성자 개수가 달라 무게 차이가 나는 원소로서, 이들 동위원소가 서로 섞여있는 혼합물은 극저온에서 물리적인 차이를 보인다.

중수소를 분리하기 위해 다공성 물질의 양자체(Quantum Sieving) 효과, 특히 ‘운동 양자체 효과’를 이용하면 마치 체로 거르듯이 중수소를 효율적으로 분리하고 저장할 수 있어 관련 연구가 활발하다.

운동 양자체 효과(Kinetic Quantum Sieving Effect)는 저온에서 무거운 동위원소가 가벼운 동위원소보다 좁은 공간을 더 빠르게 확산함으로써 마치 체로 거르는 것(sieving)처럼 동위원소를 분리할 수 있다는 것으로, 1995년 네덜란드 라이덴대학교의 빈아커(Beenakker) 교수는 중성자 개수가 작아 가벼운 원소일수록 더 큰 드 브로이 파장(de Brogile wavelength)을 가지기 때문에 좁은 공간을 빨리 빠져나가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극저온 환경에서 수소 크기에 매우 근접한 기공에서는 수소(H₂)보다 무거운 중수소(D₂)가 더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산 속도의 차이는 77K(-196℃) 이하의 극저온 조건에서 6옹스트롬(Å, 1Å=10억 분의 1㎝)보다 작은 기공에서 일어날 수 있다. 중수소 분리에 가장 적합한 운동 양자체 효과가 나타나는 기공 크기는 직경 3.0~3.4Å 정도라는 게 실험적으로 관찰됐다.

하지만 기존 다공성 물질의 기공 크기를 중수소 분리에 최적으로 조절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한 100 K 이상의 고온에서는 이 효과를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온에서도 중수소를 효율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기공 구조를 가진 시스템 개발이 절실했다.

최근 중수소를 보다 경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실마리가 나왔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오현철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최경민 교수, 막스플랑크연구소 마이클 허셔(Michael Hirscher) 박사 공동 연구팀이 영하 170도에서도 중수소 분리가 가능한 시스템을 개발했다.

▲ 녹색으로 표시된 D₂가 중수소, 빨간색으로 표시된 H₂가 수소다. 저온에서는 개구가 닫혀 있다가, 온도가 올라가면서 개구가 열려 기공(방)안으로 중수소가 들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연구팀은 온도변화에 따라 미세한 기공 입구가 서서히 열리는 독특한 다공성 물질인 ‘국소적 유연한 금속-유기 골격체’를 사용해 운동 양자체 분리 효과를 고온에서도 구현했다. 이를 통해 100K 이상에서도 운동 양자체 효과를 이용한 동위원소분리를 현실화했다.

국소적 유연한 금속-유기 골격체(Local Flexible Metal-Organic Framework)는 유기 리간드와 금속 빌딩블록으로 구성된 배위결합물 중 외부자극에 의해 기공 입구의 구조가 국소적으로 변할 수 있는 다공성 물질이다.

적절한 유기 리간드와 금속 빌딩 블록을 선택하면 원하는 외부자극에 선택적으로 반응해 기공 입구의 구조를 바뀔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최근 분리기술 분야에서 특히 각광받는 다공성 물질이다.

온도에 의해 기공의 입구를 유연하게 바꿀 수 있는 국소적 유연 금속-유기 골격체, 고온 중수소 분리 시스템(FMOFCu)을 선택했다. 3개의 기공을 가진 FMOFCu는 각 기공을 연결하는 개구(aperture)를 2개씩 가지고 있다.

각 개구는 3.6Å, 2.6Å 크기로, 온도 77K 이하에서는 수소기체 크기(2.89Å)보다 큰 3.6Å 개구를 통해서만 동위원소가 통과되며, 2.6Å 개구로 연결된 기공은 닫힌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온도가 77K 이상으로 올라가면 2.6Å의 개구가 국소적으로 서서히 열리게 되어 새로운 통로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국소적 유연성 현상을 이용하여 중수소 분리에 적합한 기공 크기(3.0~6.0Å)를 고온에서도 연속적으로 생성해 중수소에 대한 높은 선택도를 가질 수 있다.

▲ 고온 중수소 분리 시스템(FMOFCu). 극저온에서 수소 기체에 노출됐을 때, 작은 개구(2.6Å)는 닫혀있고, 큰 개구(3.6Å)만 열려있다. 온도가 올라가면 작은 개구가 열리면서 고온에서도 운동 양자체 효과를 얻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연구는 국소적 유연한 금속-유기 골격체를 이용해 고온에서 수소 동위원소 분리를 시도한 첫 연구 사례로서, 고온에서만 열리는 개구를 활용해 그간 구현하기 어려웠던 고온에서의 운동 양자체 효과를 낼 수 있는 기공 구조를 손쉽게 얻었다.

또 지금까지 발표된 운동 양자체 효과를 이용한 중수소 분리 연구 중 가장 높은 온도에서 중수소를 성공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실제 산업에서 응용 가능성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오현철 교수는 “이번 연구는 수소 혼합물에서 분리해내기 어려웠던 중수소를 고온에서도 분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며 “국소적 유연한 금속-유기 골격체를 이용하는 전략은 다른 동위원소나 가스 혼합물을 분리하는 데도 응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언급했다.

한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추진하는 중견연구자지원사업 및 해외대형연구시설활용연구지원사업의 지원으로 수행된 이번 연구 성과는 미국화학회지(JACS, Journal of The America Chemical Society)에 11월 21일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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